17~18세기 에도시대의 일본에서는 당시 비서구권 중에서는 당대 최고수준으로 정교한 상업금융과
화려한 도시 소비경제와 도시인들의 대중문화가 꽃을 피웠다.
가장 큰 대도시인 에도는 인구 100만을 넘어 거대한 행정 상업 소비의 메가시티였으며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시내 곳곳에 거미줄처럼 상수관이 깔리는 등
전근대 도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의 도시 인프라가 정비되어 있었다.
오사카는 '도지마 쌀거래소'라는 당시 세계최초의 선물거래 시장이 형성되는
상업과 금융의 메카같은 대도시였고 교토는 정신적 수도이자 고급소비문화의 중심지로서
이 두곳도 에도만큼은 아니지만 30~40만 인구에 달하는 대도시였다.
당시 일본의 대도시에서 소비되던 대표적인 대중문화로 가부키를 들 수 있는데
초창기에는 시장이나 저잣거리에서 천막 쳐놓고 시작하던 공연이
점점 일본에서 경제력을 갖춘 평민계급이 성장하고 이들의 문화소비 욕구가 폭발하며
결국 전용극장까지 생기게 될 정도로 수요가 높아지게 되었다.
극장들은 관객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낮 공연과 심야 공연을 분리하여 티켓을 판매했고
유명 스타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워 홍보하는 스타마케팅을 선보였으며
이 스타들은 지금 현대의 배우나 아이돌처럼 팬덤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의 얼굴을 그린 에하가키(그림 엽서)가 굿즈로 판매되는 등
현대의 연예계를 연상케하는 대중 엔터테인먼트가 이미 이때부터 형성된 셈이다.
동시대 유럽의 도시들에서 성행했던 연극이나 오페라 극장들도
정기 구독권이나 좌석 등급제를 도입하고 스타 마케팅을 선보인점은 같았지만
귀족 중심의 소비문화였던 유럽에 비해 일본의 경우 평민계급까지 대중문화의 향유층이 좀 더 폭넓었다는 차이는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평민들은 완전 시골 농민들이 아니라
저런 대도시에 살며 도시문화의 수혜를 받던 평민들이긴 하다)
일본이 평민들까지도 대중문화의 한 축으로 포함될 수 있었던 큰 요인은
당시 일본의 문해율이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글을 아는것은 지배층 남성의 특권이었던 전근대의 대부분 국가들과 달리
일본은 서당 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 '테라코야'가 널리 보급되어
평민 아이들에게도 글을 가르쳤는데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의 서당과 달리 여자아이들도 같이 다니며 글을 배웠고
심지어 여자가 훈장이 되어 글을 가르치는 경우까지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무사계급의 남자 아이들은 별도의 교육기관에서 유교경전을 따로 교육받긴 했지만
저런 테라코야 덕분에 당시 일본은 평민과 여자들까지도 책을 사읽거나 편지를 쓰는정도는 가능했고
이는 책 소비에 대한 욕구 폭발 -> 당시 세계적인 수준의 출판산업 부흥으로 이어졌다.
곳곳에 자리잡은 서점과 카시혼야(책 대여점)들이 독서 열풍을 일으켰고
대중적인 풍속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 유머집, 각 지방의 여행 가이드북, 심지어 주부들을 위한 요리책까지
온갖 분야의 베스트셀러들이 탄생했다.
이렇게 출판 문화가 붐을 일으키게 된 요인으로는
역시 목판 인쇄의 대중화를 꼽을 수 있다.
목판 분업(작가, 판각, 인쇄) 시스템이 완비되며 각종 책 뿐만 아니라
우키요에라는 목판화 그림 역시도 붐을 일으켰는데
그 주제 역시 누구나 한번쯤은 봤을 파도 그림으로 유명한 풍경화뿐만 아니라
여행기, 초상화, 풍속화, 춘화에 이르기까지 판매되는 종류들도 폭넓었다.
1760년대에 색판 분리기법이 등장한 후로는
이런 그림들이 '풀 컬러 포스터'의 형태로 출시되기 시작했다.
신문의 초창기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요미우리'의 등장 역시 그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위 그림은 무려 1615년에 발행된 도쿠가와 군과 도요토미 군의 최후결전을 담은 소식지인데
이런 소식지들이 대량 인쇄되어 세상에 나오면
판매원들이 대략적인 요약본 내용을 큰 소리로 읽어주며 팔았다는데서 '요미우리'가 유래되었다.
요미우리가 다룬 주요 소재들은 화재나 지진, 홍수 등의 자연재해처럼 누구나 관심가질 사건들
살인사건이나 치정사건 등 대중들의 관심을 끌만한 뉴스 등이었다.
뉴스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취재원을 신속하게 사건 현장으로 보냈고
취재원이 기사를 작성하여 원고를 인쇄소로 넘기게 되면
인쇄업자들은 목판으로 요미우리를 대량 인쇄하여 찍어내고
이를 판매원들이 가두 판매하며 시내 곳곳에 유통시키는 형태였다.
다만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인 정치 비판이나 사설까지도 실렸던
동시대 유럽 신문들처럼 언론으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단순히 정보 전달과 대중들의 흥미 유발성 타블로이드성에 그쳤다는 한계도 존재한다.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당시 이 소식을 보도하는 요미우리
신문에는 광고도 빠질 수가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속칭 '찌라시'라고 부르는 광고 전단지를
에도시대에는 '히키후다'라고 불렀는데
주로 상점이나 가부키 극장 등에서 공연소식, 개업 소식 등을 광고하는 용도가 많았지만
신사나 사찰에서 큰 행사가 있을때도 이런 히키후다를 발행하여 행사 소개와 관객 안내를 하기도 했다.
이런 히키후다 광고 전단의 시초로 알려진것이
1683년 에치고야 포목점이 발행한 히키후다이다.
에치고야 포목점은 “현금거래 시 할인, 정가 판매, 작은 단위로도 옷감 판매”라는 판매 전략을 수립하고
그러한 내용을 담은 히키후다를 제작하여 시중에 배포하며 광고했다.
이 전략으로 에치고야가 일약 최고의 매출을 올리게 되자
다른 상점들도 너도나도 히키후다를 발행하여 광고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일정 금액 이상을 구입하면 술 등의 경품을 지급한다거나, 대용량 덕용 상품을 구비한다거나 하는
새로운 판촉 기법이 활발히 고안되었고 이를 히키후다를 통해 대중들에게 광고했다.
히키후다를 발행하여 광고 기법을 시작한 에치고야 포목점은
훗날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경성에도 진출하게 되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전신이 된다.
당시 에도시대의 상점 풍경
실제로 당시 에도, 오사카, 나고야 등의 대도시 상점들은
나날이 늘어가는 도시인들의 소비 욕구를 한방울이라도 더 짜내기 위한
판촉 경쟁, 마케팅 경쟁이 매우 치열했는데
정기적인 바겐 세일이라든가 고객들이 직접 옷을 입어볼 수 있도록 진열해 놓는 등
그 시대 기준으로는 획기적인 온갖 상술과 판촉법들이 등장했다.
상점들의 상술에 따라 기모노의 유행 색상, 머리 모양이나 장신구의 트렌드가 매우 세분화 되어있었고
이런 유행들은 매우 빠르게 순환하는 편이었다.
유행에 민감한 여성들의 화려한 기모노 경쟁이 너무 과열되자 막부에서는 염색 규제라는 철퇴를 꺼내들었지만
오히려 기모노의 소재와 문양으로 경쟁하게 되는 등 나날이 커져가는 패션산업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독신 남성 가구들을 타겟으로 한 사업도 등장했으니
스시, 덴푸라, 소바와 같은 도시형 패스트푸드가 본격적으로 상품화되기 시작했다.
에도는 하루가 멀다하고 공사가 성행해서 노가다 일자리도 많았다보니
일본 전국에서 홀로 올라와서 일하는 독신 남성가구가 많았다.
그리고 이 남자들은 혼자서 밥을 해먹지 못했다(...)
이런 도시 노동자들을 위해 간단하게 끼니를 떼울 수 있는 스시나 덴푸라, 소바를 판매하는
길거리 가판이나 포장마차 노점들이 줄줄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특히 덴푸라는 화재가 많았던 에도의 특성상 집에서 해먹는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튀김 전문점들인 덴푸라미세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며 성황을 이루었다.
찻집이나 공중 목욕탕도 동네마다 번성했는데
이러한 상점들은 동시대 유럽의 살롱이나 커피하우스처럼 토론과 여론교환의 장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동시대 비서구권 중에서는 최고 수준이었던 상업금융과 도시경제의 운용 경험은
훗날 일본이 개항 후 본격적인 근대화에 나설때에도 자양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저런 경험 자체를 아예 가져보지 못한 우리나라와 달리
저쪽은 이미 전근대 시대에도 경험했던 것들을 약간 형태만 변형해서 다시 적용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초반까지도 통신사를 파견했던 우리나라에서도
저런 모습들을 분명히 다 목격했고
실제로 에도, 오사카, 나고야 등 방문했던 도시들의 번영을 보며
미개한 오랑캐들인줄 알았는데 얘네 왜이리 잘사는거야...??? 라며
혼란스러워하고 당황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